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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송인찬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특강(2) 全文</b>

송인찬 아오스딩 신부님 대림특강(2)-全文

◆ 일시 : 2013. 12. 19. (목) 20:10~21:15
◆ 장소 : 원신흥동성당

[주제] 성사 생활

[시작기도]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 춥고 눈 내리는 어설픈 날씨에 우리 원신흥동 성당 형제자매님들이 당신의 오심을, 새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한 준비하기 위해 이 시간 함께 모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비움을 통해 당신께서 충만히 채워주실 그 은총의 성사, 성체성사에 대해서, 또 주일을 지키고 있는 저희들의 신앙생활 자체에 대해서 잠시 나누어 보려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당신에 대한 생각, 또 성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도록 해 주시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보시는 당신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저희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주소서 이 모든 것 좋으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이제 성탄이 6일 남았죠? 6일 앞으로 다가온 성탄, 예수님은 매일 매일 한 발자욱씩 오시고 이제 여섯 발자욱만 남았어요,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우리의 준비는 어떠한가? 지난주에 계속 판공성사 보셨죠? 아마 여기 계신 형제자매님들은 아기 예수님의 마굿간을 잘 준비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고해성사는 비움의 성사다”라고 말씀드렸죠? 에스키모가 늑대 잡는 얘기 해드렸죠? 대답을 반밖에 안 하시는 걸 보면, 지난주에 못오신 분들도 계시는 것 같은데, 오늘은 2탄 해드리겠습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이 원숭이를 잡는 얘기,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뭐냐면, 이 중에 성사를 아직 안 보신 분들도 계실텐데, 정말 잘 비워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해드립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이, 어느 부족인지 모르겠어요. 원숭이를 어떻게 잡냐면, 원숭이가 콩을 좋아한다네요. 콩! 볶은 콩인지 강낭콩인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이 오래된 나무 같은데다가 원숭이 손이 요만큼 들어갈 만큼 거기에다 구멍을 판답니다. 그 구멍에 콩을, 볶은 콩을 넣어야 냄새가 잘 나겠죠? 거기에다 콩을 넣어두면, 원숭이가 와서 콩을 한 개만 잡겠어요? 한 주먹 움켜잡겠지요? 그런데 잡는 데까지는 좋은데, 주먹손이 어떻게 돼요? 안 빠지겠지요. 이게 함정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놓고 나와야는데, 놓고 나오다보면 이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사람한테 잡히고 마는 겁니다. 되게 멍청해 보이죠? 
우리도 사실은 살다보면 이런 바보 같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좋든 싫든 그런 일들이,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상황들이 생길 수 있는 겁니다. 
혹시 올 한 해 새로 시작하고 세속적으로 끝내시면서 내가 잡고 있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그거는 유혹을 하는 겁니다. 이걸 빨리 놔야지 내가 자유로워지는데, 결국 먹지도 못하고 잡히기만 하는 이런 것이 무엇인가, 비움의 예로 한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이전에,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인의 현주소가 어떤가? 먼저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을 포함해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제가 지난번에도 통계 말씀드렸나요? 대한민국 4%라고 말씀드렸죠?
2011년도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전체 신자의 1/4도 안 되는 23.2%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분 중에 23분만 여러분처럼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심각한 상황은 2000년대 이후로 신자는 계속 조금씩 늘어요, 영세는 계속 하시는데, 문제는 뭐냐면 냉담률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거고, 2000년도부터 신자비율이 계속 하강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신앙적으로 보면 상위 4%안에 들어가시는 분들입니다. 뭐 시골이건 도시건 본당에서 매주일 모습을 보면, 여기도 전체 인구 중 신자비율이 어느 정도 되나 모르겠지만, 성당에 오시는 분들이 미어 터져요? 교중미사 말고 다른 미사도 물론 있지만 어떤 땐 정말 썰렁합니다. 또 도시 주일학교의 경우, 초등부는 그런대로 잘 유지되지만 중고등부는 갈수록 귀하신 몸입니다. 잘 모셔야 됩니다. 왜냐면, 11월에 달에 위령성월이잖아요. 지상교회는 단련교회라고, 연옥에 있는 분들이 빨리 천상으로 가시라고 기도하는데, 우리 세대 다음에 기도할 사람이 없어서 연옥에 오랫동안 갇혀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모릅니다. 정말로 신앙의 문제는, 그래도 우리 시대에는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그럭저럭 했는데, 요즘에는 열심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낮습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의식 있는 분들은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냉담률이 증가하고 있는가? 여러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뭐냐면, 한 개인의, 보통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저 사람, 신앙이 약하니까?”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한 개인의,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 두 발로 서서 있는 디디고 서 있는 이 지반이 굉장히 무르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도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어요. 사회 현상적인 것도 좀 봐야 되는데, 그것 두 가지는 뭐냐면,
 
①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 20세기의 모더니즘을 부인하고 고전적·역사적 양식이나 수법을 채택하려는 예술 운동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 좀 어려울테지만 말씀 드릴 겁니다. 이런 경향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② 유사 영성 운동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 분들 중에 신천지교라든지, 증산교라든지, 여호와의 증인 등 많잖아요. 이런 것에 가톨릭 신자분들도 많이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내가 딛고 있는 현대 문화, 현실의 정신세계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거죠. 오히려 가부장적인 구조 아래서는 차별, 남녀간의 차별, 세대간의 차별이 있었지만, 오히려 공고했는데, 그 부분이 해체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졌다는 것,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인식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주 오랫동안 이 믿음의 생활, 믿음과 이성, 우리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생각들 있잖아요? 이것이 거의 일치가 됐었어요. 그러니까, 재정일치 사회라고 우리가 보통 얘길 하는데, 내가 왜 전쟁에 나가야 하느냐? 신이 싸우라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제라든가 왕이 무조건 하라면 하는 시대였는데, 15-16세기 들어가면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깨어납니다. 이걸 계몽주의라고도 하고 합리주의라고도 하고,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하면서, 기존에 무조건 받아들였던 것을 이성적으로 한 단계 필터링 아니 걸러서 이성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거죠. 마치 애들이 철부지일 때는 엄마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하는데, 좀 크면 어떻게 돼요? 제 주관이 생기면 ‘이거 내가 왜 해야되는데요?’ 요즘 학생들 그렇죠? 젊은 부모님들 보시면 우리 클 때랑 틀리죠?

요즘 학생들은 이유를 잘 설명해주면 열심히 해요. 그런데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으면 교육이 잘 안됩니다. 그러다보니까 이성을 너무 중시함으로 해서 환경과 과학의 발달, 이성이 발달하면서 점점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절대시하는 그런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관념론으로 흐르고 공산주의로 발달하게 됩니다. 공산주의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하면서 정신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신앙심 자체를. 이런 경향을 뭐라고 하냐면, 모더니즘(modernism 근대화)이라고 해요. 이 시대에는 생산성을 많이 높이라고 하죠. 옛날에는 가내수공업을 했는데 이제는 많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합리화, 과학화, 거대화, 체계화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모든 것이 그물망처럼 짜있어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지도 보면 다 이렇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길을 가도록 분석이 됩니다. 인공위성이 다 쳐다보고. 그런데 이런 과정 안에서, 산업 발전의 과정 안에서, 산업 발전의 목적이 뭐죠? 인간이 보다 풍요롭고, 평등되고 민주적이고 행복한 삶을 우리는 지향하는 거죠. 민주사회에서. 그런데 갈수록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진 사람은 더 갖고 못 가진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는, 즉, 이런 모든 문화나 학문의 발전의 목적이 되어야 할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아버님들 보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그 숱한 치욕 같은 것도 감내 하시면서 가정을 위해서 일 하시는데, 애들이 돈만 달라고 그러고 아버지를 별로 인정을 안 하고 어머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아버지들이 소외감을 느껴요. 어느 날 많은 자매님들은 아시던데, 남편이 아내에게 스마트폰 문자를 보냈습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 3가지 금자로 끝나는 것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문자로 보낸 중요한 금 세 가지는 소금, 지금, 황금 이 세 가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했냐면, 지금, 현금, 입금. 제가 제대로 했나 모르겠네요. 그러니까 남편들은 소외감을 느끼는 거예요. ‘야! 내가 무슨 돈 버는 기계냐?’ 이런 거 많이 느끼시죠? 가족들에게 인정받는 길은 봉투가 얼마나 두꺼우냐? 요즘 봉투도 안하죠? 다 계좌 찍어보면 나오죠? 이렇게 하다보니까 인간들이 인간소외 현상으로 발전이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어려운 얘기죠. 허무주의. 세상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이나 절대적인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취할 수 있는, 오늘 하루하루 벌어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시 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가만히 보면, 요즘 영화들 많이 보시죠? 헐리웃 영화 이런 것 보면, 어떤 주인공이 어려운 걸 이겨내고 하는데 그 목적이 뭐예요? 가족을 보호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가 나와 가족을 해치려고 하면 가서 그를 다 죽이고 자기 가족을 지켜내요. 그런데 그 안에서 이 세상의 공공의 선이라든가, 뭐 미국도 개신교 국가면서 하느님 믿잖아요. 신앙적인 것 별로 없습니다. 다 그냥 현세적인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세에 약속된 참된 행복은 소홀히 하면서 현세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수많은 일상인들을 양성, 양산하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세주의적인 경향은 바로 과학만능주의가 과학주의가 밑받침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비가 안 오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천재지변이 생기면 기도했는데 지금은 인공강우를 만들죠. 또 아이가 안 생기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도 많죠. 인공수정, 시험관아기 이런 거 하죠. 오죽하면 그렇게 할까 싶지만 어쨌든 교회는 그런 것도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다. 어쨌든 과학 발전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이러한 근대주의와 산업사회의 특징은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고 소외되었던 인간이 근대화 모더니즘 사회라고 하면 그것을 뛰어 넘어서 지나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모든 경향을 뭐라고 하냐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해요. 현대화 지나서 근대화 지나서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의 특징이 뭐냐면, 상대주의인 겁니다. 절대적인 것이 별로 없어요. 모든 가치관을 상대, 우리 사회도 보면 어떤 것을 원칙을 주장하고 할 때 사람들이 “저 사람 꽉 막혔다” “유도리가 없다” 근본을 지키려는 사람을 다 깎아내립니다. 신앙인들도 그렇죠. 직장에서 내가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다보면 여러 가지 견제들이 들어와서 우리도 모르게 흔들려요. 생명에 관한 것, 성에 관한 것, 여러 가지 윤리적인 관계들 그래서 언뜻 바라보면,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다. 때문에 절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 이걸 상대주의라고 하는데,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어 서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많이 갖고 있고 특별히 종교 다원주의라는 그런 흐름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 안에 구원이 가장 확실하게 있다고 믿고 지내시는거죠? 그거 없다고 하면 우리가 주일미사 보고 성사 보실 필요도 없지요. 왜냐면, 불교 믿는 사람들도 그렇고, 마호멧도 그렇고 이슬람도 그렇고 다 구원의 길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그러면, 굳이 성당에 안 나오고 그저 편하실 때 절 가시면 되고 다른 종교 가지셔도 되는데, 우리는 이 그리스도교 안에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점점 퇴색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떤 결과까지 나오냐면, “구원에 있어서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라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라는 겁니다. 지금 드린 말씀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뭐냐면 절대적인 것이 없고 다 상대화 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내세, 내가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뭐 별거 없었잖아요. 그래도 그분들이 갖고 있었던 건 뭐예요? 내가 하느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박해받고 살아도 나중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라는 거, 이 절대적인 기준을 점점 현세적인 것들로 물들어서 우리도 모르게 성당에 다닌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길과 이 세상의 길과 별반 다름이 없게 살아가는, 그런 우리도 모르게 세속화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내가 꼭 나빠서 내가 부족해서 그런다기보다는 이 물 자체가 지금 그래요. 비근한 예로, 어르신들은 잘 안 보실지 모르지만 야동이란 것 있잖아요. , 야한 동영상 보시는 거, 그거 분명히 6계명을 어기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남들도 다 하니까,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봅니다. 그거 분명히 죄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것을 보고 특히 학생들 같은 경우는 사람을 볼 때 성적인 존재로만 보는 거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보지를 않아요. 성범죄로도 이어집니다. 물론 그것을 많이 봐서 성범죄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겠지만 그것을 무시 못 합니다. 오늘날은 죄악스러운 것도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서 죄의식 없이 느끼게 하는 세상이라 정말 깨어서 살아가지 않으면 늑대가 자기 피를 핥으면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세태다. 그래서 우리는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확실한 결단도 여러분들은 가지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교회를 떠나가게 되는 이유가 뭐냐? 유사 영성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라고 하는 것, 그런데 우리가 보통 사이비종교라고 하는데, 그들은  나름대로 교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쓰는 말은 뭐냐면, 유사영성운동이라고 합니다. 뉴 에이지(new age)라는 거 들어보셨죠? 이런 걸 다 포함해서 유사영성운동이라고 합니다. 영성하고 비슷한데 영성이예요 아녜요? 아닌 거예요. 이거는 거짓된 영성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비그리스도적인 것 뿐만 아니라 반 그리스도적인 것,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깨어 계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우리에게 퍼져있게 되었는가? 어떠한 현상들을 낳게 되는가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화, 산업화가 가속될수록 현대인들은 비이성적인 것, 사람도 너무 막 따지고 그러면 깎쟁이 같아서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잖아요. 이 사회가 너무 팍팍해지고 그러니깐 ‘아이, 옛날이 좋았어’ 하면서 비이성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친구들끼리는 합리적인 관계가 아니잖아요. 또 부모님도 자식에 대해서 합리적일 수 없어요. 맹목적인 거지. 그래서 점점 비합리적인 것, 그리고 감성적인 것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옛날에 학교 다니실 때 일주일에 한번씩 뭐했어요? 조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줄 세우고, 요즘에도 송년회 하실 때 폭탄주 한 잔씩 돌리고, 이런 조직화된 문화에서 개별화,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 계속 생산만 하고 하다가 이제는 나도 돈 좀 한 번 써보자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보면 그동안은 뭐 끌어모으고, 자식을 위해서, 내 노후를 위해서 했는데, 막상 노년이 되어서는 누릴 줄 모르는 거예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집이 없어도 참고 살고 대출해갖고 여가와 소비가 중심이 되고 또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것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영향은 종교 안에서도 적용이 되고 있어요. 기존 종교의 제도적인 부분, 성당에 오시면 뭘 만나요? 교계제도, 즉 교황님, 신부님, 나이 드신 어르신들도 본당신부님 만나면 ‘어서 오십시오’ 뭐 이렇게 인사 하시고 또 사목회장님이나 누굴 만나려면 단계를 밟아 나가야되죠? 이렇게 제도화 된 것에서 초월적이고 영적 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비슷한 맥락에서 현대사회가 흘러가는 겁니다. 그 현상을 본다면 과거에는 사람들이 내가 신앙 잘 할려고 한다면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교무금 충실히 내고 양심 잘 지키고 이런 것으로 자기의 거룩함의 욕구를 충족해 왔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잘 포장해서 성스럽게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적이긴 하지만 촛불집회 있잖아요. 그거 사실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죠? 촛불을 켜면서 약간의 성스러움으로 포장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한참 전이긴 하지만 2002년도 월드컵 때 뭔 악마가 나왔지요? 붉은 악마, 거의 그거는 약간의 중독성과 약간의 종교성을 띠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반대하면 죄인 취급을 하고 누가 거기에 반대를 한다 그러면 독성죄로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이성이 촘촘이 짜여진 그런 종교인데, 합리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교리가 너무 합리성을 띠다 보니까 이제 그 교리보다도 기(氣무)체험, 성령체험, 아니면 무(無)체험, 그런 체험으로, 즉 교리보다도 체험중심으로 나가요. 이것도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죠? 
그 다음에 관료화나 조직화에 대한 반발로 조직을 갖고 있는 좀교, 개신교든 불교든 우리 천주교보다는 내 내면에 있는 영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ㅇ이런 것을 뭐라고 하냐면, 종교의 사사화라고 합니다. 개인화 기존의 성당에 와서 기도한 게 아니라, 우리 옛날에 가만히 보면 제사 지낼 때보면, 가장이 제주였죠? 그런 식으로 내가 여기 안에 들어오는 것보다는 내가 내 스스로의 종교를 찾아가는 겁니다. 

네 번째로, 종교를 삶의 중심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하나의 문화로, 여가로 여깁니다. 
신앙생활도 삶의 첫 자리에 두려고 하지 않고 여가생활 중의 일부분으로 여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다 버리고 산으로 갔어요. 정말 화전 하시면서 우리가 성지순례 가보면 그분들이 단 하나의 자기 목숨을 버린 것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사신거죠. 신앙이 아니면 그분들 그렇게 사실 필요도 없었고 양반이든 천민이든 상민이든 신앙 때문에 다 산으로 가셨죠. 그래서 그렇게 단 하나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였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되고 있다. 이런 종교현상의 변화로 내세, 천당, 극락을 강조하는 구원중심에서, ‘성당 왜 다니십니까?’ 여쭤보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하는 현세적인 종교로 그 중심이 이동을 합니다. 문제는 뭐예요? 성당에 마음의 평화를 얻으러 왔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왔는데, 성당에서 신앙생활, 조직생활, 단체생활 해보면 어때요? 더 열받죠? 스트레스 지수 더 올라갑니다. 그럼 어때요? 야 내가 집에서 스트레스 받고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는데, 여기 와서도 그러냐? 안 나오겠다. 그런거죠. 그래서 이러한 모든 경향에서 지내다 보니까, 성직자나 신자 공동체 등 가시적인 종교, 절이나 교회 등 건물을 갖고 있는 기존 종교는 우리만이 아니라 위축돼요. 그 다음에 물리적 시설, 교계제도, 전례, 조직화가 되어있지 않은 신흥종교들이 급부상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신흥종교, 유사영성 운동이 그들이 많은 것을 도움을 받고 있기보다는 지금 우리 의식 밑바닥을 흐르는 것이 기성 종교에 대해서 혐오, 염증을 느끼는데, 대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종교들이 새로 계속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종교. 유사 영성 운동이 참으로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부작용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실 겁니다. 많은 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뉴에이지나 유사종교 등에 빠져서 기 수련을 하다가 예수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나거나 기체험이나 성령체험, 견진성사라든가 성령세미나 가면 성령체험한다고 하는데, 이게 헷갈려서 뭐가뭔지 잘 모르셔서 혼동하다가 기 치료를 받다가 잘못돼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시고, 신원사에 마음수련하러 갔다가 잘못됐다든지, 왜 그런가 보면 유사영성운동은 외면상으로는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어요. 그릇된 인간이해가 되어 있고 수련 방법도 다른 거요. 제가 일일이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어쟀든 인간정신을 잘못 이끌고 인격적으로 어려움 주게 돼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아서 교회는 주보를 통해서라든지 계속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흐름 그런 책자라든가 그런 걸 보셨죠? 신천지교에 대해서 아마 본당신부님도 교육을 하셨을 겁니다.
예수님 말씀에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그래도여기에 계신 분들은 내가 신앙생활에 기복도 있고 냉담도 하시고 그래도 이 안에 머무르시면, 인생을 다 사시고 되돌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좋은 집에 머물렀기 때문에 좋은 나무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래도 내가 자녀들한테 다른 사람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구나 생각되시지만, 자칫 잘못해서 거기에 빠지시게 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비그리스도교적인 것과 반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식별하여서 교회의 가르침에 복음에 어긋나는 것들을 신자들에게 알리고 기준을 마련하고 있죠.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은 무엇이냐?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데 거기에 가면, 시간이 되면 따로 제가 말씀을 드리겠지만, 지금도 가끔 길거리에 가다보면 뭐를 아십니까? 접근을 해와요, 뭐 쪽지 같은 거 하나 주면서, 여러분들도 그런 분들 만나면 일단은 딱 거부하시겠죠? 그런데 한 번 언제 기회가 되시면 잘 보세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를 하냐, 이 사람들의 교리는 대부분 이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신성이 있다. 불교랑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제일 먼저 하는 얘기가 뭐냐면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내 안에 부처가 있다. 불성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인간 육체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을 내가 벗어던지면 윤회바퀴를 벗어버리면 내가 부처가 된다. 내가 신적인 경지로 나아간다. 그게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데, 뉴에이지도 마찬가지예요. 우주 만물의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이 뭐냐면, 부라만을 말씀드리면, 우주의 생성 원리, 우리로 따지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뭐냐면, 인격적이 아닌 존재인데, 부라만이라는 것인데, 이 책상을 예로 들면, 부라만이 일부분이 책상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 컵에도 이 컴에 해당하는 부라만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특히 사람 안에 들어가 있는 부라만을 뭐라고 하냐면, 칫솔 중에 무슨 칫솔이 있죠? 아트만 칫솔이 있죠? 우주의 원리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트만이예요. 이것을 벗어나면 내가 신과 합일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이 수행을 잘 하면 네가 신처럼 된다 이거예요. 그걸 빨리 깨달아라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떻습니까? 내가 신이 된다고 얘기합니까? 내가 하느님 말씀 잘 듣고 이웃 사랑 잘 해갖고 도를 잘 닦아서, 聖人성녀들이 하느님돼요? 어떻게 돼요? 죽으면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면, 하느님 나라에 내가 참여하는 거죠. 그 나라로 내가 들어가는 거지 내 자체가 피조물의 창조주가 되는 게 아니예요. 그런데 유사영성 운동이나 사이비 이런데서 하는 얘기가 뭐냐면, 가만히 결론을 들어보면, 우리에게 들어와서 네가 잘 닦으면 네가 신이 된다. 불교 교리하고도 일맥상통하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될 때 그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그사람들을 피할 게 아니라, 실은 그사람들도 진리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 아니예요? 골수한테 걸리면 골치 아픈데 잘 모르고 하는 사람들일 때는 오히려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서 잘 얘기할 수 있는데, 그러다가 잘 못 될 수도 있죠? 소극적으로는 일단 피하시는 게 좋은데, 나름대로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정말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참진리이고 2천년 동안 계속 지켜온 것이고 내가 갖고 있는 진리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죠? 기회가 되면, 오히려 그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는, 선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쨌든 이 유사영성운동은 우리가 갖고 있는 현대인들의 개인주의, 상대주의, 세속주의, 입에 딱맞는 아까 말한 콩같은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혹 넘어갈 수 있어요.

우리의 구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겁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는 것은 그분이 하셔요. 그런데 마치 내가 구원의 중심이 되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스도교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또 하나는 우리 성당에 딱 오시면 예수님 하고 관계를 맺으러 오시지만 결국 그분의 몸인 누구랑 관계를 맺어요? 교회, 신자 공동체, 구역장님, 반장님 레지오 단장님, 단체장님 하고 모여서 기도도 하시고 얘기도 나누시고 약주도 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유사영성에는 이런 게 없어요. 그냥 개인화예요.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은 공동체 영성이라는 겁니다. 함께, 즉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그분의 몸인 교회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본당 공동체라고 한다면 이 두 개가 분리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 왜? 성당에 오면 돈 내라고 하지, 신립하라고 하지, 뭐하라 그러지 뭐 하라 그러지..아유 싫어 나는 예수님 하고만 살거야..그런 분들은 합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 신앙이 성숙되기가 쉽지 않아요. 왜냐면,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내가 항상 함께 있다..말씀안에서 성사 안에서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현존하시는데, 그것을 내가 멀리하고 피한다고 하면 예수님 만나기가 쉽지 않은 거죠. 사실 좀 힘들어요. 본당에서 단체생활 하다보면 여기 와서 이런 내가 왜 욕을 얻어먹어가며 일을 해야 하나? 우리 그런 거 많이 느끼시죠? 단체장 한 번 해보시면 그런 걸 통해서 ‘아! 예수님도 이러셨겠구나!’ 내가 구역장이든 반장이든 하면서 반원들 중 누구한테 배신당했거나 뒤통수를 맞다보면, 예수님도 열두 사도 중에 그런 사람 한 사람 있었잖아요. 유다. 예수님 마음을 그 때는 잘 이해 못했는데 내가 막상 그런 입장이 되어 보니까 이런 거구나 하면서 그런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거죠.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의 조류, 유사 영성 운동 때문에 냉담률이 높아지고 있다. 자연스레 물이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듯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노를 열심히 계속 저어야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을 주님 보시기에 좋은 상황으로 만들 수 있을까? 
냉담률을 줄일 수 있을까?
뭐 소공동체 운동이다, 교회가 여러 가지 노력을 많이 하고 있죠? 결과를 내고 있는데 그런데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성사신학을 학생들하고 연구하면서, 그러면 신앙의 외적인 모습 말고 구조적인 모습 말고 우리 신앙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거, 우리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면 가장 기본이 뭐예요? 기본, 내가 신자라는 정체성을 어디서 찾아요? 주일미사, 성사생활이잖아요. 성사생활 안 하면서 내가 신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거죠.
또 여기 안에 있는 형제자매와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내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근본 뿌리인 성사에 대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대한민국 4%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어떻게 오는가?

사목 일선에서 여러분들도 여기 원신흥동 성당에 오시기 전에 다른 본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죠? 왜 그렇게 목소리가 작으시죠? 하셨죠? 오시면서 ‘에이 여기 와서 좀 편하게 쉬자’ 그런 마음 많으셨죠? 그런데 보면 선교해서 냉담자 방문해서 레지오 활동 해서 끌어 오잖아요. 그런데 끌어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분이 어떻게 해요? 또 나가요. 동기 신부가 초임 본당신부로 사목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대화를 나누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신앙의 신비가 하나 있대요. 저는 본당신부를 안 해봐서 잘 모르는데, 본당 신부하면 신앙의 신비를 안대요. 1년에 20명 영세하면 냉담자가 20명이 생긴대요. 그래서 총원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가 된답니다.  
데려오면 끝나는가? 문제는 그분들을 담을 부대, 그릇이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빈 자리를 채웠던 그분들은 어떤 계기가 되면 물 흐르듯 빠져 나가버립니다. 천주교 신자들 드런 거 있죠. 개신교에 비해서 어때요? 그냥 뭐 소 닭 보듯이 왔는가? 뭐..아주 그것이 편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개신교처럼 오자마자 형제님 자매님 하면서 그러는데, 너무 이런 것도 문제지만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그런 것도 있다. 그런데 상처받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 신부님이든 수녀님이든 아니면 본당의 형제자매들간에 상처 주고 받기는 쉬운데 문제는 상처 주고 받는 것은 사람끼리 당연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겁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예요. 궁극적으로는 냉담이라는 것도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느냐 여기에 성숙도가 달린거죠.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을 이 교회생활 안에서 특별히 성사생활 안에서 그 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계속 아무리 세례주고 냉담자 다시 돌아와도 우리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하면 다시 빠져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준에도 다시 빠져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얼마든지. 그래서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냉담자들을 걱정할 때 지금 성사를 대하고 있는 내 자세가 어떤가 잘 바라보셔야 하는데, 이 성사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왜 중요하냐면, 이 자세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의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얘기 하나 해드릴게요. 
어느 시골에 손주 하나 키우시는 할머니가 사셨어요, 아주 어렵게 사시는데, 이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아주 어려을 때 병으로 죽고 아버지는 월남(베트남) 가서 싸우다가 전사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나라에서 주는 얼마 되지 않은 연금 가지고 행상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데, 할머니 손에 크다보니까 이놈이 할머니 말을 잘 안듣고 사고를 치고 공부를 안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가슴만 애 태우다가 어느 날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데, “야! 이놈이 정신 차려! 지금 네가 먹고 있는 이 밥이 뭔지 아냐? 바로 네 애비 피다. 이눔아.”
결국 할머니의 생각에는 밥이 자기 아들의 피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피값으로 바꾼 거예요.할머니는 밥이 결국 자기 아들의 피라는 거예요. 손자놈은 그걸 몰랐던 거죠. 철이 없어서. 알았더라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성사 역시 가톨릭신자는 성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성사란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사랑이 결정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선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러한 태도는 분명히 이 선물을 마련하기까지 바쳐진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하느님의 마음을 무시하는 겁니다. 
신앙인이 성사를 소홀히 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연인이 여기 있습니다. 남녀가 있는데, 한 쪽 편에서 다른 쪽을 “나는 널 사랑해” 하면서 자기 할 일 다하고 또 일 다보고, 처음엔 뜨거웠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선순위가 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일이 된다면 이 관계는 오래 가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처음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저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다른 일보다 나를 우선적으로 둔다고 할 때 신뢰가 생기는 거고 그 사랑이 성숙하는 거지, 입으로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오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오래갈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이 나한테 주신 선물인데 그거를 소홀히 한다면, 결국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거죠. 
우리가 보통 사랑한다고 할 때,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초보적인 사랑인 거고, 상대방이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인거죠.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 그런 거죠. 자식이 내말 잘 들어서, 공부 잘해서, 부끄럽지 않아서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죠.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놈이 사고를 치건 공부를 못하건 내 새끼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데, 하느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고 내 기도를 잘 들어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한다? 이거는 자녀의 사랑인 거지 부모님의 사랑 나아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겁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처럼 우리 역시 삶의 조건이 좋든 나쁘든, 또 바쁘면 바쁠수록 더 시간을 쪼개서 주님께 내 삶의 첫 자리를 봉헌하는 그런 것이 주님을 가장 잘 사랑하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주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가부장적 군사 문화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걸 하라고 하면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 하면 내가 왜하냐고 튀겨나옵니다. 그래서 주일을 단순의 의무해서 하면 잘 먹히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향을 좀 바꿔볼라고 합니다. 주일은 의무가 아닌 나에게 필요로 하는 날로서 새롭게 주일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 왜 내가 나와야 하는지 내 안에서 스스로 이유를 찾아야지 여러분들 성당에 나오실 겁니다. 
주일미사 의무는 신자들의 뇌리에 박혀 있죠.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주일미사에 빠질 수도 있어요. 명절 때라든가 벌초 간다든가, 또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러면 그때마다 어떻게 해요? 고해성사 보라고 하죠. 고해성사 안 보고 영성체 하면 그것도 큰 죄가 돼요. 그래서 아까 23.2% 밖에 안 나오시는데, 왜 주일에 안 나오냐 물어보면 고해성사 보기 부담돼서, 고해성사 안 보려고 주일미사 다니는 것처럼, 솔직히 어던 때는 거런 거 느끼시죠? 너무 신앙생활에 반복적이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 의식의 이면에는 주일에 대한 지나친 법적인 해석과 인과응보적인 의식이 뿌리깊게 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 의무를 강조하다보니까 주일의 목적인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긴 합니다만, 주일미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일미사 참례가 왜 필요한지 이 주일미사의 깊고도 풍성한 은혜가 무엇인지 교회가 잘 알려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교회가 좀 소홀히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3계명이 뭐예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어떻게 지내는 것이 잘 지내는 걸까요? ①번 주일미사는 나오셨어. 집에 가서 찌글고 빠글빠글했어. ②주일미사는 못 나오셨어. 우리 시댁이 외교인인데 나 혼자 신자고 그래서 가족끼리 벌초를 가야되는데 산소를 가야해서 주일미사를 못 갔어. 그래도 이왕 간 김에 내가 맏며느리인데, 동서들하고 시동생들하고 깔깔 웃으면서 아주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어요. 그러면 둘 중 어떤 게 주일을 거룩하게 보낸 게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다를 수 있겠지만, 가장 잘 지낸 건 뭐예요? 특전미사 가고, 가족끼리 잘 지내는 거죠? 그런데 현대생활에서 쉽지는 않은거죠.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해 봐야는데,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주일을 내 영혼을 돌보는 날로 생각해보자. 주일을 의무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점검하는 날로 정해보자.  
요즘에 웰빙(well being)이란 말을 많이 쓰죠?&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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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유헌식요한

등록일2013-12-23

조회수9,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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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헌식요한

|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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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은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글자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서 나머지 부분은 한글파일로 첨부하였으니 필요시 다운 받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김민재

| 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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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정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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