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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성경 (1)

가톨릭 신앙의 근간이 되는 양대 축이 성경(Bible)과 성전(聖傳, Tradition)이다.

 

요즈음 신구약을 모두 필사하는 대단한 분들도 많지만 사실 성경을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쉽지가 않고 읽은 다음에 머리에 남아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적당한 때에 읽어서 뿌려진 씨의 싹을 트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므로 계속 성경을 읽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소설은 대개 “3인칭 관찰자 시점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기술된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의 인물이 내면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작가가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을 외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반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작중 인물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은 물론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입장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모두 73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46권이 구약이고 나머지 27권이 신약이다. 천 년 이상에 걸쳐 (기원전 95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 집필된 이들 책들 가운데는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책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 구약의 내용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는데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새 계약(신약)의 주인이므로 신약이 이미 구약 속에 숨겨져 있고 신약으로 구약이 드러났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천 년에 걸쳐 수많은 작가들이 집필한 73권의 책들이 마치 한 권의 책처럼 보인다는 것은 이 책의 실제 저자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란 사실을 말해 준다.

성경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고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성경은 결혼 이야기로 시작되고 (창세기) 결혼 이야기로 끝난다 (묵시록). 성경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 종말과 영원한 초자연적 삶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시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창세기) 시간에 얽매일 필요 없이 시간 밖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

 

교회와 성서

 

오늘날 교황, 주교를 포함한 모든 가톨릭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성서를 읽도록 독려한다. 중세 때 교회가 평신자에게 성서를 접할 권한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만 러스킨(Ruskin)베니스의 돌(Stones of Venice)”이란 저서를 통해 이것과는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중세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서를 가르쳤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 교회는 항상 성서를 가장 귀중하게 여겨왔고, 가장 현실적 방법들을 동원하여 신자들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로마제국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당시 오늘날의 미사와 같은 집회에서, 교회는 적합한 사람을 임명하여 그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성서를 크게 읽도록 하였다. 이 목적으로 사용된 원고들은 모두 필사본이었으므로 매우 희귀하였고, 소중하게 보호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필사되었다. 양피지가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는 전체 성서 필사본 50부를 소장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멸망 후 문맹률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제, 수도자, 수녀들이 지속적으로 성서를 필사하였으나, 평신도가 성서를 직접 읽는 것이 그렇게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교회는 나름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방법을 고안하였는데, 성화(聖畵), 성상(聖像), 모자이크, 성극(), 설교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인쇄기술 발명 후부터 교회는 성서가 사랑 받고 널리 읽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저렴한 성서가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교황은 사람들이 성서를 가까이 하도록 독려하는 많은 서신들을 보냈다.

 

교회는 매일 봉헌하는 미사 전례에서도 독서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성서 말씀을 전달하고 있으며, 성서를 개인적 기도와 명상의 자료로도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무신론적 합리주의는 물론 프로테스탄트주의자들의 잘못된 성서관(聖書觀)으로부터 성서를 지키는 수호자이다.

 

먼저 성서의 역사성과 사실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저술된 이후 지금까지 첨삭(添削)없이 전해져 왔다. 먼저 신약성서의 4대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가 정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복음사가(福音史家)가 성서를 저술한 다음, 내용이 변형되지 않고 본 모습대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사실인지 살펴보자.

 

사실을 기록한 복음서

 

4대 복음서가 저술된 시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부터 서기 100년 사이이다. 그리스도교 자료는 물론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모든 역사적 자료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서기 100년 이후,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일관되고 분명하게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 저술한 4개의 복음서가 존재함을 증언하고 있다. 처음 1세기부터 시작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작성된 문건에서 발견되는 성서 구절들만 모아도 거의 완전한 형태의 복음서를 완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또한 2세기에는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복음과 같은 형식을 가진 라틴어판(Latin version), 시리아판(Syrian version) 복음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2세기의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저술가들도 복음서가 사실적 기록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복음서를 왜곡하여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데 사용하려고 하였다. 복음서가 사도들이 집필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기들에 목적에 부합되도록 복음서 내용을 뜯어 고치려고 시도하였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유태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면 더 이상 기다릴 메시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유태인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Josephus)가 예수님이 처음 1세기를 살았던 실제 사람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유태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 가공의 인물이었다는 주장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복음서가 처음 1세기 동안 실제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것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어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당시의 실제 기록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이 전하는 진리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아직도 예수님과 복음서의 진실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예수님과 복음서의 신빙성을 없앨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처음 2세기(서기 0 ~ 서기 200)동안, 적어도 4명의 유명한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저술가들이 복음의 사실성을 증언하는 기록을 남겼다. 서기 65년쯤에 태어난 소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기독교 교리의 근본은 예수의 신성(神性)에 있다.” 라고 하였다. 서기 56년경에 태어난 로마의 원로였던 타키투스(Tacitus)도 그의 연례보고서에서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e) 통치하에서 죽은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서기 69년경에 태어나 로마 황제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긴 작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초대 그리스도교 전파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동시대(同時代)에 필경사(筆耕士)였던 셀수스(Celsus)도 예수 추종자들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소책자를 집필하였는데 거기에서도 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의 사도서간들은 복음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점을 더욱 굳건히 증명하는 자료들이다. 이 서간문들은 처음 1세기 동안 바오로를 비롯한 몇 명의 다른 사도들이 작성하였다. 서간문의 3/4이 서기 65년 이전에 집필되었다. 서간 집필자들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는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없었던 일들을 그렇게 기록할 수 있겠는가? 복음서의 많은 내용들이 서간문에서 반복해서 다시 인용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예수님 죽음 후 2, 3년 동안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라는 실제 인물들이 복음서를 집필하였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외부적(성서 외부) 증거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럼 성서 자체에서 그 증거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복음서는 그리스 방언으로 집필되었는데, 그것이 초대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로마제국 시대에 널리 사용된 그리스 방언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았던 유태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의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예루살렘은 서기 70년에 멸망을 하게 된다.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찾아볼 수 있으나 실제 망했다는 사실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복음서는 서기 70년 이전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이 너무나 상세하고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양심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복음서 독자(讀者)들은 이들 기록이 예수님의 실제 목격자 또는 당신이 보여주신 사건에 직접 연관된 사람에 의해 직접 기록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역사의 기록인 복음서

 

모든 복음사가(福音史家)들은 허구(虛構)가 아닌 실제 있었던 역사를 기록하였다. 루카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 된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 (루카 1:1-2)

 

4대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들은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또한 고고학적 발견들도 복음서에 기록된 기록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루카복음서 31절의 기록을 살펴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오십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 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¼ } (루카 3:1)

최근의 연구 결과로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였음이 밝혀졌다.

 

복음서는 참으로 성실한 기록이다. 복음서에는 저자들이 무언가를 위해서 속이려는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속임은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영광스러운 사건들은 물론 스스로 창피했던 모든 것들까지 숨김없이 기록했다. 복음서 저자들은 스스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어떠한 변명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했고;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마태오 13:36)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마르코 4:13)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마르코 6:5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요한 6:61)

 

때로는 질투심에 불타는 야망가였으며;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마르코 9:33-34)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루카 9:46)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루카 22:24)

 

또 스스로를 믿음과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하며;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마태오 26:40)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르코 16:12-1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 (루카 8:25)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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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Y안드레아

등록일2013-07-12

조회수7,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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